일본에선 한국인, 한국에선 ‘반쪽 한국인’으로 살다 일본에 귀화한 종합격투기 추성훈 선수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그는 추성훈(34)이면서, 또 아키야마 요시히로다. 두 개의 이름을 쓰기에, 두 개의 언어를 알아듣기에, 때론 두 배의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추성훈 그리고 아키야마.

추성훈은 1998년 부산시청 유도팀에 입단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그는 일본 실업팀들이 ‘귀화’를 조건으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일 만큼 썩 괜찮았던 자신의 실력만을 이곳, 한국 사람들이 봐주길 원했다. 하지만 주류 유도계는 ‘재일동포 4세’란 신분에 먼저 눈길을 보냈다.

추성훈의 가족은 1923년 일본에 정착했다. 오사카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추성훈이 태어났다. 1972년 재일동포 유도대표로 국내 전국체전에 출전해 우승한 추성훈의 아버지 추계이씨는 이듬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부상으로 탈락하는 아쉬움을 겪었다. 대신 국가대표 수영선수 유은화씨를 만났고, 1975년 추성훈을 얻었다.


한국 선수 이기자 관중석에서 “쪽발이”

 

지난해 12월31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종합격투기 대회에서 추성훈 선수가 미사키 가즈오 선수를 링 바닥에 누인 채 공격을 퍼붓고 있다. 추 선수는 반칙 논란이 거센 이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패배했다. (사진/FEG 코리아제공)

 

 

세 살 때부터 유도장에 드나든 추성훈은 학창 시절 또래들을 능가하는 기량을 갖췄지만, 그곳에서도 ‘재일동포 4세’란 벽을 만나야 했다. 전국대회 같은 주요 경기엔 일본 국적이 없는 탓에 자신에게 졌던 2·3등 선수에게 출전권을 양보해야 했다. 아버지 추계이씨는 끝까지 한국 국적을 지킨 것에 대해 “차별이 있었기에 더 한국인으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별에 져서 굴한 것 같은 느낌이 싫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에게 한국행을 직접 권했다. “일본에선 배울 수 없는 한국 유도를 배우라. 그럼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한국 유도를 배울수록 추성훈의 마음엔 상처만 커져갔다. 유도계를 장악한 ‘특정 대학’ 출신이 아닌 탓에, 그 대학 출신 심판들한테서 정당한 판정을 받지 못해 정상 문턱에서 무너지고 만다는 피해의식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추성훈은 외국인 심판들로 구성된 2000년 코리아오픈에서 당시 81kg급 최강자 조인철 등을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쯤 되니 대한유도회는 그를 대표팀 2진으로나마 뽑을 수밖에 없었고, 추성훈은 2001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 금메달을 가져왔다. 이 대회에서 추성훈은 전 경기를 한판으로 이겼다. 그건 마치 한판으로 이기지 않으면 자신이 인정받을 수 없다는 조급증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고, ‘이러고도 내가 안 된단 말인가’라며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서글픈 몸짓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추성훈은 이후에도 심판 텃세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의혹을 지우지 못했다. “한국 사람이니까, 국가대표 하고 싶어서 귀화 안 하고 이곳에 왔다”던 그의 말은 “여긴 말을 해도 안 된다”로 바뀌고 말았다. 그는 부산시청 소속 지인에게 “일본에서도 한국 사람이라고 불이익을 주더니, 한국에서도 반쪽 한국 사람이라고 불이익을 당한다”는 말을 남기고, 3년7개월여 만에 한국을 떠났다. 유도계는 81kg급 조인철이 하향세였고, 이 체급의 새 강자가 추성훈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쫓아가 붙잡지 않았다.

그는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젠 일본으로 귀화한 지 두 달 만에 그쪽 대표가 된 아키야마 요시히로란 이름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산시청 소속으로 훈련했던 구덕체육관 매트에 일장기를 달고 올라선 그는 결승에서 한국 선수와 맞붙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관중석에서 ‘쪽발이’란 소리까지 흘러나왔지만, 경기 뒤 기자들에게 “저는 원래 한국 사람이니까, 국적 관계없이 (관중들이)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왜 귀화했느냐’는 물음엔 “유도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만 답했다. 한국에서 받았던 서운한 감정을 애써 감춘 건 앞으로도 자기 스스로 ‘추성훈’이란 한국 이름을 지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은 강하다”며 비수 꽂은 미사키

2003 세계유도선수권 우승이 좌절된 뒤 2004 아테네올림픽 출전까지 무산된 그는 그해 말 종합격투기 선수로 전향했다. 그리고 2005년 11월 한국을 다시 찾았다. 외국팀과 한국팀으로 나뉘어 싸운 격투기 대회에서 그는 한국팀 소속으로 뛰었고, 경기 뒤 링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오랜만에 한국 와서 시합해 너무 기쁩니다. 진짜 행복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한국 사람이 아니에요. 일본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가슴 안에는, 지금 여기 들어가는(들어 있는) 피는 완전 한국입니다. 더 열심히 해서 한국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도복 한쪽 어깨에 태극기를, 또 다른 쪽에 일장기를 달고 링에 오르는 그는 ‘한국의 추성훈, 일본의 아키야마’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그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07년 마지막 날. 추성훈은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종합격투기대회에서 프라이드 웰터급 챔피언 미사키 가즈오(31·일본)와 맞붙었다. 턱을 얻어맞은 추성훈은 주저앉았고, 일어나려는 찰나 상대가 휘두른 킥에 코뼈가 부러졌다. 미사키가 추성훈의 두발과 두손이 땅에 닿은 상태인데도 규정에 어긋난 사커킥을 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게다가 미사키는 피가 줄줄 흐르면서도 악수를 하러 온 추성훈을 밀치며 마이크를 잡고 “너는 많은 사람과 어린아이를 배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소리쳤다. 추성훈이 2006년 12월31일 일본 격투기 영웅 사쿠라바 가즈시(39)와의 경기에서 몸을 미끄럽게 만드는 크림을 바르고 승리해 출장정지 중징계를 받은 걸 지적한 것이다. 당시 추성훈이 TV 카메라 앞에서 몸에 로션을 발랐다는 점에 비춰 의도성은 없어 보였지만, 처음부터 이 사실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한 추성훈은 거센 도덕성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 화살의 방향은 때론 아키야마가 아닌 ‘재일동포 추성훈’이란 또 다른 그를 향해 날아가기도 했다.

여기에 피를 닦으며 링 밖으로 나가는 추성훈의 뒤통수에 대고 미사키가 “일본은 강하다”고 한 것이 국내 팬들을 흥분시켰다. 그 말은 언뜻 ‘아키야마’가 아닌 ‘추성훈’을 겨냥한 것으로 들렸고, 두 개의 이름을 택한 그에게 너무 비정한 비수처럼 보였다.

 

“그를 좀 자유롭게 해줬으면 좋겠다”

추성훈의 아버지는 말한다. “아들이 가슴 아프게 부산에서 돌아와 귀화를 결정했을 땐 말리지 못했다. 나로선 한국에서는 추성훈으로, 일본에서는 아키야마로 불렸으면 좋겠다.” 추성훈의 격투기 측근은 “이제 그를 좀 자유롭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추성훈도 얘기한다. “추성훈은 가슴에 새겨져 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내 이름이다. 그래서 추성훈도 나고…, 아키야마도 나다.”

그의 말은 편견에 사로잡혀 추성훈 속에서 아키야마를 끄집어내지 말고, 아키야마 속에 있는 추성훈을 공격하려 하지 말고, 이제 격투기에서 정상에 오르고 싶은 자신의 도전만을 오롯이 봐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들린다.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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