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수상작 연재] 가작-한승완 남산타워 - (산문, 지체, 수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수상작 연재] 가작-한승완 남산타워 - (산문, 지체, 수필)

남산타워

 

한승완

 

- 내비게이션

 

벚나무의 비화(飛花)가 하얀 눈처럼 보였다. 벚꽃이 떨어져 해끗대는 도로가 동화책 속 그림이었다. 남산타워를 오르는 길이었다.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서울 외출. 내 기억 속에 처음 서울을 간 건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이모네 집에 갔던 일이 살포시 기억에 살아 있다. 운전을 해서 처음 서울에 간 것도 이모네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때는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여서 서울 가기 며칠 전부터 지도책을 펼쳐놓고 길을 찾았다. 하지만 대전의 좁은 도로에서만 운전하던 나에게 서울의 넓은 도로들은 지도책을 보며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조각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무모함 같았다. 무모함은 때론 용기를 주기도 한다. 차를 세우고 낯선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길을 묻고 또 물어 구로동을 겨우 찾아갔다. 사랑도 그래야 했다. 무모한 사랑은 후회를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무모함도, 용기도 없었다.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있기에 지도책을 펼칠 일도,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는 무모함도 필요 없다. 내비게이션이 남산타워 앞까지 안내를 해 준다. 목적지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처럼 삶도 시비(是非)를 알려주는 신문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비게이션이 길을 다 안내한 후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자신 있게 말해주듯이, 잠자리에 들기 전 별님이 내려와 ‘오늘 하루도 잘 살았습니다.’라고 귓속말을 해준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혹시 내 아집과 착각으로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곧 옳은 길로 나의 삶의 방향을 돌릴 수 있도록 말이다. 사랑도 그렇다. 첫사랑 그녀를 보내고 그토록 마음 아프고 후회할 것을 알았다면 눈물로 돌아서는 그녀를 한 번쯤은 잡아봤을 텐데 말이다.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라며 위로해 보지만 가슴속의 내비게이션은 그녀를 보낸 일이 잘못된 길이라며 자꾸 돌아가라고 한다. 그 길은 이미 없어져 버린 길인데. 그녀와 헤어진 후 계절은 사계절이 뚜렷한데 내 마음은 항상 얼어붙은 겨울이다. 후회가 지나가야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오는 건 신의 영역을 넘지 못하게 하려는 조물주의 계획일지도. 

 

- 지름길과 에움길

 

남산타워에 오르면 잃어버린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사랑이 불타오를 때 그녀와 꼭 남산타워에 함께 가자며 약속했었다. 그녀와 헤어졌지만, TV에서 남산타워가 나오면 주마등처럼 그녀가 떠오르곤 했다. 추억 속에 얼어붙어 있는 미련에게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으면 봄기운에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처럼 그녀와의 추억도 살포시 일어나서 내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처럼. 보고 싶은 사람.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며 겪었던 아픔을 천 배로 겪어도 좋으니 그러고 싶은 사람. 하지만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서울 가기 며칠 전 남산타워 홈페이지에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인데 자동차를 타고 남산타워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지 글을 남겼다. 곧바로 답이 달렸다. 버스가 올라오는 길까지 장애인차량은 통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타워 앞에 기둥이 있는데 전화를 하면 뽑아서 장애인차량은 타워 앞마당까지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서둘러 볼일을 마친 후 내비게이션에 남산타워를 누르고 출발했다. 그녀도 혹시 남산타워에 오지 않았을까? 아님 한 번쯤 남산타워에 다녀가면서 내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상상만으로도 설레었다. 남산타워 입구를 오르는 길까지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었다. 통행료를 내니 버스가 올라가는 길의 차단막을 올려주었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으로서 가끔 누릴 수 있는 지름길의 특권. 되도록 천천히 남산타워를 올랐다. 운동하는 사람들, 연인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그녀도 참 고왔다. 별빛보다 빛나고 꽃보다 향기로웠다.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창조물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그녀에게서 배웠다. 한참을 오르자 버스정류장이 나왔고 남산타워 앞마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안내해 준 것처럼 커다란 말뚝이 박혀있었다.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하자 공익요원이 나와 말뚝을 제거해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산타워를 마주하게 되었다.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떨렸다. 그녀에게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날처럼. 휠체어를 타고 이쪽저쪽 살펴보느라고 신이 났다. 그녀의 예쁜 얼굴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 마냥. 둥근 얼굴, 호수를 품은 두 눈, 오뚝한 코, 복사꽃 같던 두 볼, 앵두 같던 입술.  

 

내가 올라온 길 맞은편으로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름길로 오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만약 휠체어를 타지 않았다면 나는 천천히 걸어서 남산타워에 올랐을 것이다. 되도록 에움길로 말이다. 그녀와 꼭 한번 와보자며 약속했던 남산타워. 그녀와 함께였다면 풀잎 하나, 바람 한 조각, 벚꽃 한 잎도 명품 그림이 되었을 텐데. 그녀는 없지만 주고받던 편지며 함께 꿈꾸었던 사랑을 천천히 끄집어내며 에움길로 올라오는 길이 힘들거나 멀다고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지름길이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지름길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에움길에서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죽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지만, 사랑을 이루기 위한 힘듦과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는 에움길이 아니라 그녀와 헤어지는 지름길을 택했다. 장애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용기가 없었던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문제였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남산타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긴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에움길로 돌아왔다면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까.

  

- 바닷물을 다 부어도 채울 수 없는 커피 한 잔

 

벚꽃과 개나리는 전생에 무엇이었기에 봄이면 저리 만나 사랑을 할까. 그녀는 나에게 우린 인연이라며 신은 전생에 이백 번 어깨를 스쳐야 이생에서 한 번의 만남을 허락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우리는 전생에 수만 번 어깨를 스친 인연이었고 덕분에 이생에 또 만난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전생에 그녀와 나는 벚꽃과 개나리였다면 좋았을 뻔했다. 그렇다면 이생에서 더 오랫동안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다음 생은 그녀와 나는 해님과 달님이 되어 살아가겠지.  

 

매표를 하고 남산타워 안으로 올라갔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물론 어디가 어딘지는 알 길이 없었다. 서울은 생경한 도시였다. 한참을 구경한 후 남산타워 모형의 기념품을 사서 내려왔다. 기념품을 사듯 시간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를 처음 만나 사랑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시간을 살 수 있다면 내 남은 생을 지불해도 좋겠다. 시간을 만든 신은 보란 듯이 그 무엇으로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게 해버렸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일분일초도 가슴을 치며 애태워야 할 만큼 소중하다. 다시 못 올 길이니 말이다. 

 

타워를 내려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테이크아웃을 하여 타워 밑 벤치 앞에 휠체어를 주차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데 마음이 따뜻해졌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 식도를 지나 심장을 지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그녀까지 따뜻하게 적셔주었다. 잠시나마의 행복.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지나가는 바람도 그녀인 것 같다.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할 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내 손에 쏙 들어온 커피 한 잔이 전해주는 이 순간의 은밀한 행복.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가 나의 볼을 쓰다듬어 주는듯한 착각은 세상 그 무엇을 가진 것보다 황홀했다. 내 손에 담긴 커피 한 잔은 바닷물을 다 담아도 채우지 못할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의 바다도 나를 이토록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없으니 말이다. 소소해도 마음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들과 함께 할 때 진정한 행복이 문을 열고 찾아온다. 해님은 나에게 따스한 봄 햇살을 나누어 주고 나는 사랑의 눈빛으로 보이는 나무와 꽃들에게 행복한 눈물로 목마름을 적셔주고 싶었다. 세상 모든 것이 행복해지길 기도하면서. 그녀도 어디선가 꼭 행복하길 바라면서.

 

- 사랑은 자물쇠로도 잠글 수가 없다

 

남산타워 곳곳에 자물통들이 매달려 있었다. 조금 갑갑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나온 길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렇다면 그녀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 나의 심장에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마음속에는 그녀가 살고 있는 작은 집이 있으니. 나에게 매일 편지를 쓰고 호출기에 음성메시지를 남기던 그녀와 남산타워 이곳에 둘만의 이름을 적고 자물통을 잠그고 싶었는데. 그때 그녀와 남산타워에 와서 둘의 이름을 써 놓고 자물통을 잠갔다면 우리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하지만 아무리 튼튼한 자물통이 있더라도 사람의 마음까지는 잠가놓을 수 없는 법이다. 사랑하는 마음도 물이 증발하듯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사랑은 변한다. 아마 그녀와 나의 뜨거운 사랑도 그랬을 것이다 라며 위로를 해 본다.

 

무슨 청승인지 자물쇠를 샀다. 펜으로 무엇을 적을까 고민했다. 잠시나마 나와 그녀의 이름을 적어 놓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자물통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씨를 다 쓴 다음 다른 자물통 틈에 잠갔다. 그녀와의 추억 하나 자물통에 넣어 이곳 남산타워에 남겨 놓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 족하다. 남산타워에 걸려있는 수많은 자물통을 바라보며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신이 나에게 보내주신 선물이었다. 휠체어를 탄 채로는 높은 곳에 자물통을 잠글 수가 없어서 낮은 곳 벤치 의자에 있는 곳에 자물통을 걸었다. 휠체어를 타면서 가끔 한계를 경험한다. 사랑도 나에게는 벅찬 한계였다. 그래도 오르려 했으면 조금 더 올랐을 텐데 후회가 된다. 죽을힘을 다해 올랐다면 그녀를 영원 하루 전까지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 내려오는 길  

 

다시 공익요원에게 전화를 걸어 말뚝을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웃으며 말뚝을 뽑아준다. 휠체어를 타고 부탁을 많이 해 봤던 터라 얼굴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다. 올라왔던 길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내리막길이었지만 올라올 때 보다 느리게 차를 몰았다. 내려오는 길에 펼쳐진 장면 하나하나를 사진 찍듯 마음에 담고 싶었다. 아름지게 서 있는 나무도, 풀잎 한 잎까지도 마음속에 새겼다. 그녀가 한 번쯤은 이곳을 지나쳤을 거란 생각에 해끗대는 벚꽃 잎들이 나를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천천히 또 느리게 내려와도 끝이 눈앞에 나타났다. 자동차가 남산타워에서 조금씩 멀어지자 백미러 뒤로 남산타워 윗부분의 모습이 들어오더니 이내 작아지고 사라졌다. 사랑도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지고 나도 결국은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느리게 살아가더라도 세월은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남산타워가 완전히 보이지 않자 남산타워 벤치에 남겨 놓은 내 마음으로 남산타워를 꼭 앉아 주었다. 그녀와의 추억을 살려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오는 길이 있다. 사랑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사라져가고 아프지만 추억이란 꽃이 피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날에도 내가 사라진 자리에 소박한 수선화 한 송이 피어나서 향기로운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그 꽃은 꼭 그녀가 매일 바라봐 주는 그녀의 집 앞마당에 심겨졌으면 좋겠다. 그녀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봄바람이 참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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