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18-수필-최우수상]-김효정 - 우리라는 ‘숲’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18-수필-최우수상]-김효정 - 우리라는 ‘숲’

우리라는 ‘숲’

김효정

  
나는 동정이라는 게 당사자에 대한 오독과 오만의 협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정을 한차례도 바랐던 적이 없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나는 사연팔이를 싫어한다. 다만 내가 지금껏 어찌 유대를 이루지 못하고, 생기 없는 한 그루의 몸으로 살아왔는지를 써 내려가려면 그 이유에 대한 사실적시 정도는 필요하겠다 싶어 밝힌다. 나는 작은 불편함을 가진 장애인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혼자가 되어 사람에게서 숱한 상처를 받았다는 그런 일은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그것은 쉬운 일이다. 한없이 미워하거나 혹은 용서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자못 명확한 경우가 아닌가.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 혼자이길 택했을 때 찾아온다. 언젠가 지인에게 가슴속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의 감정이 다소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의 판단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외려 그에게 고마웠다. 내게는 이해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벽이 여느 이보다 하나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깨쳐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혼자일 때 가장 이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유대를 포기하고 혼자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해의 벽을 무너뜨리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없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렇게 생활하기 시작하니 자괴감에 젖어드는 시간들도 차츰 사라져갔고, 노상 날이 서 있던 마음도 많이 부드러워졌으며 무엇보다 하루가 편안해졌다.  
  
다만 그 편안했던 시간 속에서도 점차 가슴이 피폐해져 간다는 느낌을 때때로 받았다.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도 가끔씩 찾아오는 고독은 비참한 새벽을 안겨주곤 했다. 좀 더 활동적인 생활을 못 하는 탓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막연히 혼자의 몸으로라도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그러나 사람과 마주하기는 싫었다. 되도록이면 사람이 적고, 사람이 아닌 다른 것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고심 끝에 목발을 짚고 향한 곳은 집 뒤편에 있는 작은 동산의 숲이었다.      
  
집 가까이 있는 그 산은 어린 시절 가끔 찾곤 하던 곳이지만 줄곧 위로 오르기만 했지 옆으로 향한 적은 없었다. 정상엔 높기만 할 뿐 좁은 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기에 나는 산 중턱에서 망설임 없이 횡으로의 등반을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곳이 편백나무 숲이었다. 
  
숲은 거창한 수사를 쓸 필요 없이, 말 그대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수련한 연록 아래 부스스 잠에서 깨는 산수국, 흰나비처럼 뿌리에서 줄기로 날갯짓하는 조팝나무 꽃, 나팔꽃보다 제가 더 예쁜 소리를 낸다며 한껏 목을 높이는 새들. 아름다움은 눈이 아니라 내 감성의 결로 생생히 다가와 앉았다. 고독으로 인해 잠시 흔들렸던 편안함이 점차 숲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편안한 횡행(橫行)이 어느샌가 일상이 된 이후론 숲에 갈 때마다 그곳에 눕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누군가는 베개의 형태로 편백나무 숲을 베고 자지 않던가. 더욱이 베개가 아닌 본연의 형태인 숲에서 잠을 청하는 일의 즐거움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실제로 잠에 들지는 않았지만 분명 꿈은 꾸었던 듯하다. 사람이 아닌 자연과 아름다운 유대를 이루게 되는 꿈을 말이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디딜 자리가 적은 정상과 달리 숲은 널따란 곳이다. 나는 이 숲에서 누군가와 동행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가지게 됐다. 사람이 싫어 들어선 숲에서 사람과 잇고 싶어지다니, 스스로 모순적인 구원을 택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현수막 하나가 숲에 새로 달려 있는 것을 봤다. ‘산악 동아리 회원 모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수막 끈을 벗처럼 정답게 하나씩 잡고 있는 두 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이곳에서 나만 그런 마음이 든 게 아니었구나 하는. 잇고 싶은 열망, 유대의 바람이 나뿐만이 아니라 뭇사람들도 함께 갖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며, 내 모순에 대한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냈다. 
  
결국 나는 회원이 되었고, 그들과 인연이 되어 지금도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그 만남의 자리는 아직까지 숲으로 한정되어 있다. 좋은 수기가 되려면, 이를 계기로 치유를 받고 숲 밖에서도 사람과 유대를 가지는 법을 알게 됐다는 그런 얘기를 끝으로 적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글 한 편의 성공을 위해서, 내 삶과 숲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쓰는 실패는 하고 싶지 않다. 여전히 나는 현재진행형의 고독을 가진 사람이니까, 아직 완전한 유대는 서툰 혼자이니까. 

  
오늘도 산에 올라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언젠가는 숲 밖에서도 사람과 마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분 좋은 물음표를 조심스레 머금으며 바람을 맞고 있다. 나처럼 바람을 만끽하겠다는 듯 가지를 팔처럼 벌린 나무들의 몸피 아래, 오늘 하루 잠깐 내 두 발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고개를 드니 잎들이 태양을 깨물고 있고, 불어오는 바람은 가지를 스치고 지나 현을 켜기 시작한다. 풍현(風眩)에 저무는 숲의 오후는 아름답다. 
  
눈으로, 귀로 한없이 평온해지는 순간 대뜸 잎사귀 하나가 내 옆으로 떨어진다. 저것은 이 나무의 천 년이 담긴 일지일까. 찬찬히 잎을 더듬으며 나무와 숲의 시간을 읽어본다. 그러고 나니 내 얼굴에 와닿는 바람이 마냥 아름답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한 그루의 몸으로 우뚝 서기까지 모이고 모여 숲을 이루기까지 혼자서 시리고 아린 것을 견뎠을 나무의 시간이, 잎을 넘어 바람에서도 읽힌다. 결국 바람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나를 감싸고 있는 숲의 둘레 덕분임을 깨닫는다.
  
자기검열로 스스로를 가두었던 시간들, 혼자란 사실에 한없이 무너졌던 순간들이 때때로 바람처럼 매섭게 불어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히 아파해야 할 때임을 알고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숲이라는 유대의 둘레를 이루기까지 그와 같은 시간을 보냈듯이 말이다. 이제 나도 그 둘레에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나무처럼 팔을 들어, 넓게 벌려본다. 그렇게 수형(樹形)의 몸으로 받아내는 바람이 비단 괴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 숲과 관련된 앞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메모지에 ‘숲’이라고 써놓고 그것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 단어에 비밀같이 숨겨진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상형문자도 아닌 한글에서 모양을 찾고 뜻을 부여하는 게 무슨 당위가 있는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고작 한 음절의 몸피로 푸르고 광활한 의미를 담아내는 단어의 힘에 작은 감흥을 느낀 것이 그리 비약적인 감상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숲’을 쪼개어 나뉜 부분을 한자로 치환해 보면 ‘人一立’이 된다. 보이는 대로 해석하면 사람이 하나씩 일어나 있는 게 곧 숲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비밀을 공유하고 싶다. 우뚝 선 채로 부단히 삶을 살아내면서도, 외등처럼 캄캄한 밤을 끌어안고 고독하게 지내는 우리네 인생들과 함께 말이다. 그들 스스로 외등이 아닌 하나의 나무가 되길 바란다. 그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기를 바란다. 여린 잎 하나 피고 짐에도 한 해의 하늘땅 뜻이 올올이 서려있는 법인데, 사람이 모여 이룰 우리라는 숲은 얼마나 따뜻하고 복된 의미인가. 결국 숲은 우리네 세상의 투영인 것이다. 그러니 그와 같이 울창하게 모여들자. 그리고 푸르게 살아내자. 나는, 유대의 힘을 믿는다.

 

 

-직장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최봉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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