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0-수필-최우수상]-이현이 - "구름이 전해주는말"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0-수필-최우수상]-이현이 - "구름이 전해주는말"

구름이 전해주는 말

 

이현이

 

  뭉게구름을 보면 나는 지금도 가슴 아프다. 오래전, 차를 몰고 어딘가 가는 중이었는데 가을 하늘에 양털 같은 뭉게구름이 너무나 멋지게 떠 있었다. 마음이 고통으로 미어지고 아렸지만, 유리창 가득 들어오는 구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와! 소리가 나왔다. 그때 나는 아이들을 두고 가출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난데없었다. 나는 죽을 것처럼 살 떨리게 아파도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여전히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걸 보면서 한없이 작고 왜소함을 느꼈던 것 같다.

 

아들이 4학년, 딸아이가 1학년 때였다. 하루는 술 취한 남편이 막무가내로 주먹질을 했다. 컵이나 재떨이, 세간살이 등을 던져 시퍼렇게 멍이 들거나 병원에 가서 꿰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손찌검을 한 적은 없었다.

고막이 터지고 턱뼈가 어긋났다. 밥알이 씹히지 않는다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 말이 입아귀가 맞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비슷한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이렇게 사는 게 아이들에게도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란 생각이 들었고, 이러다가 내가 죽겠구나 하는 절박감에 작은 암자에 들어가 머리까지 밀었다.

 

하지만 아이들 걱정에 학교가 보여도, 지나가는 아이가 눈에 띄어도, 눈물샘이 터진 것처럼 대책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감성적인 내가 눈물이 메마른 이유는 그때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는 남편의 통사정으로 모질게 마음먹고 감행했던 가출은 두어 달 지나 막을 내렸다. 아들과 딸은 이상한 머리를 하고 나타난 엄마였지만,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아이들을 보니 나도 살 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 뒤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덤프트럭 기사였던 남편은 4관왕이었다. 술, 여자, 폭력, 도박에 이어 욕설을 부상처럼 달고 다녔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불편한 다리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하는 것은 모두 나의 몫이었다. 워낙 기질이 드세고 체력도 강해서 나는 제대로 말대꾸도 못 하고 살았다. 결혼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저 사람은 건드리면 큰일 내겠다는 생각에 더 참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20대 후반,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을 때였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 춥고 배가 고파 들어간 칼국수 집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 봤지만, 마치 동네 오빠처럼 친근하게 굴던 그 사람이 왠지 편하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세상 물정에도 어둡고 남자를 만나본 경험도 없는 숙맥이었다. 

 

그와 교제하면서 평상시엔 멀쩡하다가 술에 취하면 난폭해지는 모습을 보고 헤어지기로 결심한 적도 있었지만,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 애원하는 그를 내치지 못했다. 내가 뭐 그리 잘났다고 한 남자의 진실 된 마음을 짓밟는단 말인가. 사랑으로 감싸주면 그의 주사도 없어질 거라 믿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내가 처음 받아보는 프러포즈라 더 끌렸으며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거다. 

 

나는 혼자 살고 있던 그와 함께 지내다가 산수유가 노랗게 고개를 내밀던 

이른 봄에 식을 올렸다. 결혼식 바로 전날 그는 만취 상태에서 누나와 통화하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였다. 그 밤중에 안산에 사는 누나 집엘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술에 취하면 눈빛이 변하는 그를 어르고 달랬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예식 때 입을 양복과 와이셔츠와 다른 옷들을 거실 바닥에 잔뜩 쌓아 놓고, 차에서 기름을 빼 와 뿌린 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기가 막히고 어이없고 무서워 나는 얼어붙은 듯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불길이 타오르자 광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더니 담요에 물을 적셔 거세게 타오르던 불을 끄기는 했지만, 온통 시커먼 그을음과 매캐한 연기가 집안에 가득 찼다. 자정이 지난 꼭두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술이 깰 때까지 난동을 부렸다. 컵을 던지고 옷가지를 헤집어 놓고 부엌칼을 가져와 다트 하듯 문짝에 던졌다. 악몽 같은 어둠이 희부연 하게 밝아오는 새벽녘에야 그는 짐짝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칼이 방문에 탁탁 꽂히던 소리는 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나는 패물을 챙겨 넣은 가방을 끌어안고 구석에 앉아 잠든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도망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염없이 생각을 곱씹었다. 시댁 형님은 술 끊는 약을 먹여서라도 버릇을 고치게 할 테니 눈 좀 붙이라며 수화기 너머로 달랬다. 예식장에 왔는데 신부가 사라져 황당하실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3개월 된 아기가 내 배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예식장에 가서 신부 화장을 했다. 그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일하던 곳 사장님의 헐렁한 양복에 촌스러운 넥타이를 매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예식을 치렀다. 폐백을 드릴 때는 업어주라는 말에 온종일이라도 있겠다며 내려주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안 계셨고 여러 형제가 있었지만, 워낙 꼴통이라 대 놓고 뭐라 하지도 못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남편이 술에 취하면 무섭고 두려웠다. 차라리 바람을 피울망정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게 더 마음 편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혹시 몰라 칼부터 숨겼다.

 

한 번은 만삭이라 절뚝이며 걷기도 힘든 내게 막걸리와 담배를 사 오라고 했다. 심부름을 가면서 하늘을 향해 물었다. 도대체 내가 왜 저 사람과 만나야 했을까요?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나요? 아무리 따져 묻고 생각해 봐도 해답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은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결혼 전날 이 악물고 도망쳤다면 나의 삶은 달라졌을까? 소아마비 장애만 없었어도, 임신만 아니었어도 판단하기가 조금은 수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결혼 생활 15년 동안 내가 가진 소망은 흉터 없는 거실 바닥을 닦아보는 거였다. 새집으로 이사를 해도 얼마 못 가 긁히고 패인 자국이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유리 파편을 주워 담으며 이게 장미 꽃잎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실제로 날카로운 유리에 찔린 적도 있었는데 떨어지던 핏방울은 꽃잎 같았다. 그와의 인연이 나의 업보였다면 그 악연이 소멸되고 그때는 헤어질 수 있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암담한 날들을 어찌 살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먹먹하다. 

 

그 세월 견디다 보니, 두 여자와 살림을 할망정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겠다는 이상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그와 마침내 이혼하게 되었다. 등본을 떼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의 이름이 사라진 종이쪽지가 뭐라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싱글 맘이 되어 학습지 방문 교사를 시작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안하고 홀가분했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불행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거라고 한다. 길고 긴 세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긴장감은 오히려 내 안의 우물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이 삶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깨달아야 할 무언가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리지만 엄마였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때와 비교하면 견딜 만했다. 이젠 원망이나 반감도 없다. 어쨌든 그는 아빠이고 아이들을 내게 선물한 장본인 아니던가. 

 

내 삶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걷히고 지금은 햇살 가득 품은 흰 구름처럼 착하고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모든 건 바람처럼 구름처럼 지나간다. 어차피 살아내야 할 몫이라면 받아들이고, 가볍게 사는 게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에 감당 못할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예전의 아픈 나를 위로해 주던 구름이 천재 예술가처럼 다양한 형상을 만들고 또 미련 없이 흩어버리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새털처럼 가볍게 물처럼 유연하게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로 늘어서 있었다. 마치 점자 같았다.

 

사람들이 점이 되어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저 글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조피디의 취한 음성이 떠올랐다. 

“누아르가 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칼이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지, 사람이 칼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되면 안 되잖아.”

 

진우는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일어선 채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서있는 것을 보고는 승무원이 다가왔다. 진우는 아무 일 아니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까만 점들 사이를 지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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