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 영원히 감독으로 남고픈 김정남
상태바
[THE LEGEND] 영원히 감독으로 남고픈 김정남
  • 스포츠 피플 타임즈(Sports people times)
  • 승인 2019.10.17 1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한축구협회 공식 2016.11.15. 11:21

 

대한축구협회가 한국 축구사에 공적을 남긴 인물을 릴레이 인터뷰한다. 첫 시간에는 1960년대부터 200년대까지 선수와 감독으로 큰 성과를 이룬 김정남 한국OB축구회장을 만났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호칭이 감독입니다.”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수비수이자 감독인 김정남(74) 한국OB축구회장의 말이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감독이라는 직업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여전히 현장을 그리워했다.

1942년에 태어난 김정남은 선수로서 1960~1970년대, 지도자로서 1970~1980년대에 한국 축구의 중흥을 이끈 인물이다. 잠시 축구 행정가로 면모했던 그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울산 현대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OB축구회장으로서 원로 축구인들의 복지에 힘쓰고 있다. 그의 축구 일대기를 일문일답을 통해 따라가 보자.

 

축구를 시작한 때와 계기는?

골목에서 동네 친구들과 축구를 시작했다. 어릴 때 흑석동에서 살았는데 근처 운동장에서 어른들이 하는 축구경기를 철조망으로 된 담 너머로 보며 ‘축구가 이런 것이구나’를 느꼈다. 제대로 된 경기에 나가본 것은 은로초등학교 6학년 때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나갔는데 한 경기를 뛰었다. 이후 보성중학교에 들어가서 한동안 축구를 안 하다가 2학년 때 반 대항 축구경기에 나갔다. 3학년 때는 축구부에서 경기를 했지만 팀이 2부에 소속돼 있었고, 그저 그런 팀이었다(당시 중,고등학교 축구는 1,2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축구를 잘 하는 학교로 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1학년 도중에 한양공고로 갔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이전에는 공격을 했는데 한양공고로 옮기며 풀백으로 전향했다. 잘 하는 선수가 너무 많아 수비수를 하지 않으면 후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했지만 대표팀에 가면 역시나 수비였다. (수비수 전향은)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한 거라고 본다.

 

5형제가 한명 빼놓고 모두 축구를 했다고 들었다.

바로 밑 동생은 공부를 참 잘했다. 그 아이를 빼고 그 밑에 쌍둥이 둘(강남, 성남), 막내(형남)는 축구를 했다. 강남이와 성남이는 대표선수가 됐다. 최정민 감독님이 나중에 이 둘을 대표팀에 뽑아서 코치였던 나를 비롯해 형제가 대표팀에 같이 있었다. 같이 있으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눈치도 보이고 불편하더라.

 

당시에는 체육특기자 제도가 없었는데도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떻게 고려대에 들어가게 됐나?

고등학교 3학년(1962년) 3월에 청소년대표팀에 들어갔고, 8월에 성인대표팀 메르데카컵에 선발됐다. 당시 후보였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때 홍덕영 선생님의 추천으로 고려대학교에 스카우트됐다. 하지만 고려대에 간 것을 처음에는 후회했다. 등록금을 다 냈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학점을 못 따서 유급이 된다. 선배들 중에도 졸업을 못한 분들이 있다. 내가 공부를 아주 잘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졸업은 했다. 지금은 모든 대학이 전국대회 성적을 중요시하니 선수들이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선수도 학생이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 지금은 제도적으로 그럴 필요가 없으니 공부를 안 하는 것이다. 안타깝다.

 

1962년 처음 청소년대표에 선발돼 아시아 청소년선수권에서 준우승했다. 첫 국제대회 참가라 감회가 남달랐겠다.

정확히 기억하는데 그때 국민소득이 60달러였다. 그때 처음 태국을 가서 그곳의 푸른 잔디를 보고 놀랐다. 당시 우리는 잔디를 보기 어려웠다. 축구 환경, 생활수준 등이 우리보다 풍요로웠다. 축구 실력은 동남아와 우리가 큰 차이는 없었다. 결승에서 태국에 져 준우승했다. 당시에는 말레이시아, 버마(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이 만만치 않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참패, 1967년 일본에서 열린 멕시코 올림픽 예선, 1969년 서울에서 열린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연달아 실패를 맛봤다.

대학교 2학년이던 1964년 올림픽에서는 3경기 중 2경기를 뛰었다. 그때 체코에 1-6, 아랍공화국에 0-10으로 졌다. 참패를 당하니 창피하고, 한편으로는 상처가 아물며 우리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1965년 메르데카컵에서 우승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했다. 1967년에는 일본과 비기며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는데 당시 일본은 독일의 유명한 크라머 감독을 데려와 실효를 거뒀고,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다. 당시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3-3이던 경기 막판에 김기복이 때린 중거리 슈팅이 캐논슛으로 날아갔는데 크로스바에 맞았다. 비가 와서 공에 흙이 묻은 상태라 크로스바에 한동안 공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돌아보면 참 아쉬운 순간이었다. 1969년에는 호주에 밀려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국제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느끼게 됐다.

 

1970년에 국가대표 1진 청룡팀 주장으로 메르데카컵과 킹스컵, 방콕 아시안게임까지 3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좋은 성적을 거둔 원동력은?

1969년에 유럽 원정을 갔다. 양지축구단(1967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축구단)이라고 거기 소속된 선수는 다 대표선수였는데 외부의 대표급 선수를 추가로 합류시켜 유럽 원정을 3개월 넘게 다녀왔다. 축구 역사상 최장기 전지훈련일 것이다. 유럽 팀과 경기를 하다가 아시아에서 하니까 쉽게 느껴졌다. 역시 경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김호 선수와 대표팀 수비 콤비를 이뤘다. 위치와 역할 분담은 어땠는가?

당시에는 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다. 지금은 포백이 일자로 서는데 당시에는 한 명의 수비수가 뒤에 서는 스리백이었다. 뒤에 있는 사람은 커버하는 역할, 나머지는 맨투맨으로 마크하는 수비 형태였다. 센터포워드에게 공이 갈 때 김호가 과감히 돌진하며 루즈볼 상황을 만들면 내가 낚아채는 식으로 수비를 했다. 당시는 대표팀 훈련 시간이 많았다. 소집하면 한 달 이상 훈련하기도 했다. 서로 호흡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다. 김호는 스피드와 헤딩력이 참 좋았다. 나는 수비수인데도 헤딩하는 게 싫었다. 보성중학교 시절 비오는 날에 물 먹은 공으로 헤딩 연습을 시키더라. 그게 아프고, 힘들고, 미숙하니까 헤딩하는 게 싫더라. 나중에 깨달았지만 헤딩은 신장이 큰 선수가 유리하지만 위치 선정이나 예측 능력이 좋으면 그렇게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2016111510435(1).jpg"우리 골키퍼가 상대의 크로스를 제대로 쳐내지 못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크로스가 스핀이 걸려서 휘어져 들어왔더라. 감독인 나도 그런 걸 몰랐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세계 축구와는 차이가 있었다."

 

1972년에 1년간 호주 유학을 했다고 알고 있다. 어떤 취지에서 하게 됐는가?

당시 장덕진 대한축구협회 회장님이 호주로 유학을 가라고 했다. 근육이 좋지 않아 은퇴를 한 상태에서 지도자 교육을 받으러 갔다. 호주 사람 집에서 숙식을 하고, 지역 팀에 소속돼 선수로도 한 시즌 뛰었다. 말도 안 통하고 힘들었지만 여러 가지로 축구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됐다.

 

은퇴 이후에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나? 처음부터 지도자를 하려고 했나?

호주에서 돌아온 뒤 1973년에 선수 겸 직원으로 외환은행 팀에 있다가 선수 은퇴를 하고 근무만 했다. 처음에 외환은행 총무과에서 일하는데 자꾸 축구만 생각나고, 일이 손에 안 잡혔다. 하지만 선수로는 수명이 다 했고, 그렇다고 뚜렷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함흥철 선생님이 대표팀 감독이셨는데 와서 코치를 해보라고 말씀해주셔서 외환은행에 사표를 내고 1974년에 함 선생님을 따라갔다. 1964 도쿄올림픽 당시 내가 막내로 뛸 때 함 선생님이 골키퍼였는데 그때 잘 봐주신 것 같다. 당시에는 지도자 자격증을 따서 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함흥철, 최정민, 문정식, 한홍기 등 축구의 대가들 밑에서 일하게 됐다.

 

1970년대 후반 국가대표 1진 화랑팀은 차범근, 허정무 등 좋은 선수를 보유하면서 아시아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면서도 월드컵 예선은 통과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럽, 남미 등 선진국과의 교류가 부족했다. 국제 교류가 중요하다는 걸 또다시 절실히 느꼈던 때였다.

 

1980년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에 감독으로 참가했다. 준결승에서 정해원의 2골로 북한을 2-1로 누른 경기는 한국 축구사의 명승부로 꼽힌다.

북한과 경기는 흔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당시 북한과는 관계가 경직됐고, 선수들도 서로 말은 해도 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 상태에서 경기를 하다 선제골을 내줬는데 선수들이 오히려 실점하기 전보다 응집력과 투쟁심이 살아났다. 그런 와중에 정해원이 두 골을 연달아 넣으며 2-1 역전승을 하며 이겼지만 손실이 컸다. 부상자가 많았고, 긴장을 많이 한 상태에서 이기니 허탈해진 상태에서 결승전을 맞았다. 선수들은 이미 다 끝났다는 생각이었다. 그럴 때 지도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던 대회다. 쿠웨이트는 예선에서 3-0으로 이겼으니 이번에도 못 이기겠나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전력 누수가 생긴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도 북한을 이겨 한국에 돌아와 카퍼레이드를 했다. 준우승하고 카퍼레이드한 것은 처음이다(웃음).

 

1985년 열린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코치로 있다가 말레이시아 원정경기에서 지고 문정식 감독이 사퇴하는 바람에 감독으로 승격했다.

고인이 되신 문 감독님에게는 너무 죄송스럽다. 내가 코치로서 잘 보필했어야 했는데... 문 감독님은 지도력도 훌륭하고, 특히 기술축구를 가르쳐 호평을 받았다. 우리 시대에는 말레이시아에 가끔씩 결정적일 때 발목을 잡혔다. 그때도 말레이시아에 가서 첫 경기를 졌다. 그 경기를 지면 거의 기회가 없다고 봐야 했다. 국민들도 많이 실망했다. 문 감독님은 저와는 상의도 없이 돌아오자마자 사퇴서를 내셨다. 그래서 내가 감독을 맡게 됐다. 아마도 누가 감독을 하든 결과는 뻔하니 네가 맡아서 마무리하라고 했던 거 같다(웃음). 그래서 김호곤을 코치로 해서 대표팀을 맡았다.

 

1985년 11월 일본을 누르고 32년 만에 월드컵에 나가게 됐다.

1983년에 프로축구가 출범하면서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됐고, 출전 선수들도 기량이 좋았다. 거기에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월드컵에 가게 됐다. 모든 선수가 자기 기량을 최대한 발휘해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의 초석을 만들었다.

 

대망의 1986 멕시코 월드컵 첫 경기가 아르헨티나였다. 마라도나를 막을 작전이 무엇이었나?

보편적으로 지역방어보다는 대인방어를 했다. 특히 마라도나는 김평석 선수에게 전담마크를 시켰다. 공만 못 잡게 하라고 했는데 안 되더라. 그 선수가 너무 긴장해서 결국은 빨리 실점하면서 바꿨다. 허정무를 투입해 역할을 맡겼는데 잘해냈다. 월드컵 사상 최초로 득점을 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르헨티나와 마라도나는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심전심으로 자리 잡았다. 경기가 끝나면서 좋아지더라. 하지만 모르는 것이 많았다. 우리 골키퍼가 상대의 크로스를 제대로 쳐내지 못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크로스가 스핀이 걸려서 휘어져 들어왔더라. 감독인 나도 그런 걸 몰랐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세계축구와는 차이가 있었다.

 

대표팀 전임 감독제가 아니라 프로 축구 감독을 겸임했다. 프로 축구에서는 유공 감독으로 1989년 우승을 경험했고, 울산 현대 감독으로 2005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올림픽과 월드컵을 하는데 세계 흐름에 발맞추려면 A매치뿐만 아니라 프로축구가 중요하다.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시행착오가 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정몽준 회장 아래 대한축구협회 전무로서 일했다. 월드컵 유치도 하고 많은 일을 하셨는데 축구 행정을 해본 소감은?

정몽준 회장님께서 처음 회장직을 시작할 때 월드컵을 유치해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생소한 이야기고, 지식도 없었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딜 가도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래도 밀어붙였다. 정 회장님이 직접 FIFA 부회장이 되셨고, 집행위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다니며 고생하셨다. 나도 작지만 힘을 보탰다고 본다.

 

본인의 70년 축구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다. 이제는 후배들과 사회에 환원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남은 소망이 있다면 우리 대표팀이 FIFA랭킹 10위 안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남은 인생 동안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서 작지만 밀알이 될 수 있도록 한 몫을 하겠다.

 

*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기술리포트&매거진 <ONSIDE> 11월호 'THE LEGEND'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