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ㅣ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녹취작가 이상원 2007-02-09 14:47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때는 지난 1996년이었다. 그때는 애틀랜타 올림픽이 미국에서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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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을 거뜬히 치러낸 우리 선수들은 그곳에서 열심히 경기를 펼치면서 선전을 하고 있었다.


레슬링은 그중에서도 아주 비인기 종목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레슬링 해설가가 있었다. 이른바 빠떼루 아저씨의 출연이 그것이다.

"
선수 빠떼루 줘야 함다!" 통하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흥분한 모습이 역력한 리얼한 경기장면 묘사, 가끔 튀어나오는 방송적이지 못한 표현들, 이것 때문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덩달아 레슬링도 인기종목으로 떠올랐다.

운동선수도 이제 기술로서의 운동만이 아니라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충고하는 빠떼루 아저씨!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경기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영준 교수를 2 8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 오후 4 5)에서 만나보았다.

(
인터뷰 전문)

벌써 년이 넘도록 사람들은 교수님을 빠떼루 아저씨로 기억을 해요. 실물은 처음 뵙는데 굉장히 체구가 아담하고 단단하시네요. 손도 그렇게 크지도 않으시고요. 요즘도 운동을 하시나 봐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
지금도 제가 지나가면 이름은 몰라도 빠떼루 아저씨 간다며 좋아해 주십니다. 건강은 특별히 관리는 하지 않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을 합니다. 선수시절에는 경량급이었기 때문에 몸무게가 48~52㎏이었지만 지금은 73~74 정도의 몸무게를 14년간 유지하면서 아주 편안하게 지냅니다.

교수님도 하시고 스포츠문화원도 운영을 하시던데요.


- 주택공사에서 27 근무하고 수원의 경기대학교 스포츠과학 대학원에 교수로 재직한 지는 7년째입니다. 스포츠문화원은 대부분의 교수가 가지고 있는 연구 분야의 자원들을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생활체육에 참여도 하고 서로 동고동락하는 그런 취지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레슬링 선수로 출발하셨는데 그때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
1 때까지 계속 유도를 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레슬링을 시작했어요. 제가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아서 날렵하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1 2개월 정도를 해서 전라북도 대표선수가 됐고 그해 전국체전에서는 2등을 했어요. 3 조선일보 주최 청룡메달에서 고등학생으로는 드물게 2등으로 뽑히면서 본격적인 레슬링 수업을 받았지요. 1970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것을 시작으로 72 뮌헨올림픽까지 국가대표선수로 활동을 했고, 유인탁, 김원기 선수가 금메달을 땄던 84 LA 올림픽에서는 감독을 했지요.

레슬링도 등급이 있는데 선수를 분류하는 것과 경기방식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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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때는 플라이급, 밴텀급, 페더급, 라이트급이었지만 지금은 체급으로 나눕니다. 54 미만부터 있고, 130 넘으면 자격을 주지 않다. 경기방식은 자유형(프리스타일) 그레코로만형이 있어요. 자유형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느 부위든 상관없이 상대선수를 공격하여 걸어 넘겨서 점수를 따면 되는 부문이고, 그레코로만형은 상체부위를 공격하는 기술로 점수를 따는 스타일입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 심권호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스타일이 그레코로만형 스타일이고, 유인탁 선수가 금메달 따는 형식이 자유형이고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처음에는 자유형이 강했는데 지금은 그레코로만형으로 메달을 많이 따고 있습니다.

레슬링은 체급을 분류하는데 굉장히 까다롭다고 들었어요.

-
옛날에는 매일 시합 4시간 전에 체중을 쟀어요. 사람이 체중을 많이 줄이고 밤에 혼자 누워 있으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요. 고요한 소리에 기울이고 하룻밤을 꼬박 새우게 되지요. 이러한 고통 속에 체중을 감량하고 시합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장창선 선수의 경우도 금메달을 눈앞에 두고 체중 200그램을 줄이고자 사우나 실에서 사투를 벌이며 밖에도 나오게 하고 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24시간 전에 체중을 재고 하루에 시합을 끝내기 때문에 많이 좋아졌죠. 저는 48~52㎏의 경량급이었는데 8 동안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참고 견디면서 체급의 대표선수 생활을 유지했어요. 오죽하면 여덟 형제의 장남인 저만 키가 작고 다른 형제들은 키가 커서 동생들이 저를 ''분재인간''이라고 불러요.

그럼, 레슬링 선수들의 훈련 방식은 어떻습니까? 올림픽에서 메달을 많이 따는 효자 종목이니만큼 이면에는 수많은 땀과 노력이 있을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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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하고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보통 8시간 이상을 스파르타식으로 훈련합니다. 아침에 6시부터 4 정도 달리는 것을 시작으로 점심 전에 웨이트와 써켓트 트레이닝을 충분히 합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기술훈련을 하지요. 레슬링은 순발력과 지구력을 겸비해야 하기 때문에 훈련이 혹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그때의 우리는 기술개발보다도 정신무장을 하고 경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기합도 많이 받았어요. 많은 양의 훈련을 하다 보니까 뒤에 숨어 있는 비애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인간이 무엇인가를 극복하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면 여덟 계단까지는 무난하게 가지만 계단 올라가기가 힘이 들지요. 당연히 그것을 올라가는 방법은 쉽지 않을 것이고요.

그렇게 맞으면 잠이 정도의 호된 기합과 귀에 실핏줄이 터져가면서까지 했던 심한훈련…. 부모님의 반대는 없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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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반대하셨죠. 제가 국가대표를 마칠 때까지 시합 번을 오신 적이 없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남매의 장남인 제가 공부를 해서 면사무소 서기나 수리조합 서기 하기를 바라셨는데 하라는 공부 않고 운동만 하니까 굉장히 못마땅해 하셨죠.

육순 지난 아버지도 알아들을 있는 해설을 하겠다 결심

교수님 하면 아무래도 감칠맛 나는 해설이 떠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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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끝나고 주택공사에서 계속 근무를 하면서 중계도 하게 되었습니다. 끝나고 아버님께 시합에 대해 물어보면 설명을 하세요. 누가 금메달을 땄다는 것은 아시지만 어떻게 땄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시더라고요. 자식이 중계한 것을 아버지가 모를 정도면 그건 실패죠.

그때만 해도 레슬링이 일본유학생으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멋스럽게 해설한다고 일본말과 영어와 불어 등의 외래어를 섞다 보니까 우리 시청자들 대부분이 이해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관심도 줄어들고.. 그래서 육순 넘은 우리 아버지도 알아들을 있는 해설을 해야 하겠다 생각하고 연습을 하기 시작했죠.

제가 해설에서 중요하게 차별화를 두었던 것은 가지였어요. 하나는 레슬링 기술을 전부 압축시키고 정형화시켜서 편안하게 우리말 음소로 바꾸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기결과에 대한 예측이었어요. 편안하고 쉬운 해설과 함께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어떤 선수가 이기고 질지를 예측해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었죠.

예를 들어 ''쩨끄나이프 잡았다'' ''저런 때는 팔을 맞잡고 우쪽으로 돌리면 2점이죠''라던가 , 대부분이 선수가 오른팔을 잡으면 상대선수가 왼발을 지탱하는데 자세의 발에 있는 동작에 따라서 누가 빠른가가 금방 나타나요. 그런 상황의 설명을 통해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정보를 주고 우리 선수가 애절하게 졌을 때는 안타깝게 표현해 주면서 재미와 흥미를 주는 거죠. , 빠떼루 자세가 재밌잖아요.

정확히 빠데루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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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떼루는 불어로 레슬링 용어예요. 고의로 눈을 찌르거나 머리를 잡아당긴다거나 팔을 비트는 반칙을 선수에게 벌칙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뒤에서 공격을 하도록 하는 거죠. 한때는 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유럽의 레슬링이 강했어요. 그래서 프랑스 용어가 많은 대부분 ''''파테르'''' 발음을 해요. 우리나라는 문교부 표기법상 '''''''' '''''''' 발음을 하지요. 게다가 스웨덴 강사들이 심판강습을 많이 오는데 스웨덴 발음이 ''''빠떼루''''여서 대부분이 심판강습을 받으면서 구전으로 내려오게 되었지요.

해설을 그냥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이 연구를 하시고 특히 아버님을 모델로 잡았다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인 같아요. 보통 우리 관객들은 아버님 정도의 수준이고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애틀랜타 올림픽을 통해 빠떼루 아저씨로 소위 스타덤에 오르셨는데 처음에는 실수도 많으셨을 같아요

- 그때는 표준말만 써야 했으니까 많이 혼났는데 그래도 시합을 보다 보면 흥분하게 되니까 머리를 머리끄댕이라고도 하고 고향이 전라도 부안이라 급하면 사투리도 나오고 그랬지요. 0.1초를 다투는 시합이다 보니 많이 흥분되고 급할 수밖에요. 한때는 그런 것이 금기시됐지만 이후로는 오히려 그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어요.

애틀랜타에서 돌아와서는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유명세를 치렀어요. 그때만 해도 방송은 하일성씨 같은 분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방송 섭외가 들어오기도 하고 CF 찍고... 다니는 곳마다 ''''빠떼루 간다.''''하면서 부르니까 가족들이 같이 다니려고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보면 좋아하고 웃으니까 보람되기도 했어요.

결혼 1 동안 밥도 짓고 지금도 걸레질 잘해

부인이 무용을 하셨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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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사람이 콩깍지가 씌어서요. 그때만 해도 저는 키도 작고 시골출신에다 직장도 그저 그랬는데 저를 선택해주어 무척 고맙지요. 그래서 결혼하고 동안 밥도 제가 했습니다. 지금까지 걸레질도 해주고요. (웃음)

운동이 끝나고 주택공사를 들어가서 27년을 근무하셨는데 그때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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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동선수가 하냐는 편견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은 컴퓨터로 모든 업무들을 하지만 그때는 주판으로 했기 때문에 대학원 졸업하고 주산부기학원과 펜글씨학원을 6개월간 다니기도 했지요. 그런데 열심히 준비해서 시험을 보고 진급을 해도 운동선수라는 선입견 때문에 운이 좋아서 거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그때 오기가 생겨서 남보다 시간 일찍 가고 시간 일했어요. 내가 운동선수로서 무너져버리면 뒤의 후배들과 다른 운동선수들이 욕먹을까봐 정말 부지런히 살았어요. 말단직원으로 시작해서 홍보실장까지 했는데 모든 운동선수 중에서 유일하게 자회사가 아닌 곳에서 홍보실장까지 사람은 저뿐일 거예요. 한때는 승진시험을 위해 아내와 아이는 처가에 보내놓고 퇴근 후에 사설행정학원을 6개월 동안 다녔어요. 매일 여섯 시간을 공부했는데 지금도 눈감고도 시처럼 줄줄 외울 정도예요.

그렇게 해서 계장시험에서 2등도 하고 , 건설부의 공사에서 계장 20명씩을 3개월간 연수 교육시킬 때도 다른 사람들 먹고 즐길 한숨을 줄여가며 공부를 해서 1등을 하기도 했어요. 저는 운동선수가 체력과 정신은 누구보다도 강하기 때문에 그것만 활용한다면 져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쉰이 넘어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셨어요. 정말 열정적이신데 교수로서의 생활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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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채로 교수되고 스포츠경영 박사학위를 마쳤는데 제가 선수, 코치, 감독을 해봤기 때문에 실무와 이론이 겸비되어 있고 수많은 현장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제자들이 많이 좋아합니다. 지금도 매일 신문 스크랩도 하면서 계속 배우는 것에 집중을 하고 있어요.

레슬링 계를 지켜온 레슬링계의 대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것도 많으실 같아요

- 가지를 말하고 싶어요. 첫째로. 세상을 살면서 즐거움만 가득하면 안됩니다. 역시 많은 것을 얻을 있는 것은 고통이고 노력일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살아가는 방식은 노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고요. 번째는 운동선수들도 이제는 옛날처럼 기술자적인 레슬링 선수와 운동선수로 남기보다는 생각하는 기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초등학교 때부터 재능이 보이면 길에서 최고가 되고자 공부는 아예 시키지도 않고 훈련만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연, 사회, 문화, 인문학적인 것들의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꾸준히 공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기술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CBS ''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 오후 4 5분에 방송된다.

정리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녹취작가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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